• 2023. 4. 27.

    by. pearls of 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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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소비에트 몽타주와 형식주의 전통

     

     그리피스 감독은 효과적인 감정과 생각의 전달 방법에 관심이 많은 실용적인 예술가였다. 1920년대의 많은 구소련 영화감독은 그리피스의 연상원리를 발전시켜 몽타주(montage) 편집’, 주제적 편집을 위한 이론의 기틀을 닦았다. 푸도프킨 감독은 그가 정의한 구성적 편집(constructive editing)’과 관련하여 논문도 작성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그리피스의 클로즈업 사용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피스가 클로즈업을 그저 많은 의미가 담긴 롱 쇼트를 설명해 주는 역할로만 사용했고 그 용도가 너무 제한적이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사실상 이때까지의 클로즈업은 흐름을 방해하거나 중지하는 데 그쳤을 뿐, 그 자체만으로 전달하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이어 푸도프킨은 각 쇼트는 새로운 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쇼트의 병치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즉 쇼트 자체만으로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 아닌, 쇼트의 병치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것을 주장한 것이다.

     

     많은 구소련의 감독은 파블로프의 심리학 이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관념연합과 관련한 실험은 푸도프킨의 스승인 레프 쿨레쇼프(Lev Kuleshov)의 편집실험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쿨레쇼프는 일관된 액션을 만들기 위해 연결한 여러 단편적 디테일로부터 영화 속 관념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다시 말해, 영화에서의 의미는 단독 쇼트가 아닌 두 쇼트의 병치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의 정서적 의미 역시 감독이 여러 대상을 적절히 연결해 편집하고 나서야 생겨난다고 보았다.

     

     하지만 당시 구소련의 영화이론가들은 몇몇 부분에 대해 비판받기도 했다. 이 같은 테크닉은 현실에서의 시간과 장소의 연속성을 전부 재구성해 신(scene)의 사실주의적 감각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푸도프킨을 포함한 구소련의 형식주의 감독들은 롱 쇼트로 포착한 사실주의가 오히려 현실에 과하게 가까워 영화적이기보다 연극적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현실 세계는 부적절하고 무관한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영화는 현실의 피상적인 모습만이 아닌 그 본질을 포착해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물의 질감, 상징, 클로즈업, 그 외 여러 디테일을 병치하지 않은 채로는 서로 미분화되어 뒤섞인 진짜 삶에 잠재한 관념을 의미 있게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 일부 비평가들은 이렇게 조작적인 스타일의 편집은 관객을 감독의 의도대로 너무 과하게 지도해 관객에게 선택의 여지 또한 없애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예술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대립물 사이의 역동적 대립을 포착해 그 변증법적인 갈등을 예술의 소재뿐 아니라 예술의 형식과 기교를 통해 구체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에이젠슈타인 역시 모든 예술에서 갈등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예술은 운동을 동경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이와 함께 편집의 예술성을 특히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푸도프킨과 쿨레쇼프가 주장한 것과 같이 영화예술의 기초는 몽타주라 믿었고 신의 각 쇼트는 불완전하고 의존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푸도프킨과 쿨레쇼프와 달리, 편집은 꼭 변증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푸도프킨과 쿨레쇼프는 쇼트 A와 쇼트 B의 갈등은 AB이다라는 공식을 주장했지만, 에이젠슈타인은 쇼트 A와 쇼트 B의 갈등은 질적으로 아예 새로운 요소 C이다라는 생각을 가졌다. 따라서 이러한 에이젠슈타인에게 편집은 정교한 연결이 아닌 거친 충돌과 같았다.

     

     푸도프킨과 에이젠슈테인의 차이는 그저 학문적 구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둘의 서로 다른 접근방식은 사실 굉장히 대조적인 결과를 불렀다. 푸도프킨의 영화는 고전의 전형으로, 그에게 있어 영화의 쇼트는 부가적인 요소일 뿐, 감정에 기반한 전반적인 효과는 스토리에 의해 유도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는 충격적인 영상들을 통해 지적인 공격과 방어를 표현하며 이를 이데올로기적 논쟁으로 키워가는 경향이 있다. 두 감독은 내러티브 구조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푸도프킨의 스토리는 그리피스의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에이젠슈테인의 스토리는 훨씬 더 느슨한 구조를 띠고 있으며 각각의 에피소드는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은 느낌이다.

     

     푸도프킨은 감정을 물리적 상관물, 즉 현실 공간에서 찍은 물리적인 영상들을 통해 표현했다. 예를 들어 고역스럽고 고통스러운 감정은 진흙에 빠져버린 짐수레의 디테일을 통해 보여주는 식이었는데, 바퀴를 다루는 손, 진흙, 수레바퀴의 클로즈업, 용을 쓰는 얼굴, 바퀴를 당기는 팔 근육 등이 그 디테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에이젠슈테인은 이러한 푸도프킨의 상관물들이 사실주의에 너무 갇힌 것이라 생각했으며, 영화가 문맥과 연속성으로부터 온전히 분리되기를 원했다. 그는 영화가 문학처럼 시공간에 상관하지 않고 상징적인 비유를 만들어가며 유연해질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또 영화는 주제와 관련되거나 은유적으로 유관한 이미지를 담고 있어야 하지만, 이것을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에 나타나는 연기 스타일은 대부분 굉장히 거칠고 노골적일 뿐만 아니라, 고압적인 교훈주의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정치적 치밀성은 분명 그의 강점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전함 포템킨(Potemkin)’에 등장하는 유명한 시퀀스인 오데사 항구의 계단 시퀀스는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훨씬 더 세련되게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본래의 힘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뿐더러, 커팅이 매우 신속하고 율동적으로도 매혹적인 느낌이기 때문에 관객이 신의 충돌과 서사적 흐름,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인간애에 깊이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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