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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앙드레 바쟁과 사실주의 전통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은 영화감독이 아닌 이론가이자 비평가였으며 영향력 있는 프랑스 저널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의 편집인이었다. 이 저널은 특히 푸도프킨과 에이젠슈테인 같은 형식주의 감독들과 반대되는 영화 미학을 주장했다. 바쟁 역시 영화의 사실주의적 성격을 부각하는 편이었지만, 효과적인 편집 기술을 적용한 영화를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쟁은 자신의 책에서 ‘몽타주는 감독이 영화를 제작할 때 사용가능한 수많은 테크닉 중 하나일 뿐’이라고 이야기했고, 대부분의 편집은 신의 효과를 사실상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바쟁은 또한 사진, 영화, TV와 같은 매체는 다른 전통 예술과는 다르게 인간의 개입을 극소화함으로써 현실세계의 영상을 자동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한 ‘사실주의 미학’을 주장했다. 바쟁은 영화만큼 포괄적으로 물리적 세계를 표현하는 예술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근본적으로 영화의 영상은 실존하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사실주의’라는 개념의 본질을 따져보았을 때, 영화는 그 무엇보다 가장 사실주의적인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영화감독은 시공간의 현실적인 연속성을 지켜야 하며, 롱 쇼트, 와이드 스크린, 딥 포커스, 장시간 촬영 등 모든 극적 변수를 하나의 미장센에 포함하거나 패닝(panning), 트래킹(tracking), 틸팅(tilting), 크레이닝(craning) 등을 사용해 이를 달성할 수 있다.
바쟁은 ‘주제적 편집(thematic editing)’과 같은 형식주의적 테크닉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다양한 왜곡이 현실의 복잡성을 자주 침범한다고 보았으며, 고전적 편집 역시 충분한 오염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각각의 쇼트는 관객의 생각보단 감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타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전적 편집은 사건을 주관화하기 쉽다는 것이다. 또 그는 편집이 관객이 실생활에서 스스로 내려야 할 결정을 편집자가 대신하도록 만들며, 관객은 편집자의 분석을 별다른 비판적 사고 없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특권을 박탈당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바쟁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일정 부분의 선택과 구성, 해석이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알고 있었다. 바쟁은 예술적 일관성을 위해 일부 현실은 왜곡되고 희생될 수밖에 없지만, 그 와중에도 인위성은 최소화하려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또 영화는 현실을 다소 강조해야 하지만, 감독은 일상적인 대상과 사건, 장소의 시적 함축성도 드러내야 한다고 보았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들을 시적으로 표현해 낸 영화는 더 이상 물리적인 세계의 객관적인 기록도, 상징적인 추상화도 아닌, 인위적으로 재창조된 전통 예술의 세계와 꾸밈없는 삶의 모습 사이 독특한 중간자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바쟁의 기준에서 가장 우수한 영화 또한 매체의 객관적인 특성과 예술가의 개인적인 비전이 균형을 이루는 작품이었다.
바쟁은 영화발전사에서의 모든 기술적 혁신은 영화매체를 사실주의의 이상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1920년대 후반의 ‘사운드’, 1930, 40년대의 천연색과 딥 포커스, 1950년대의 와이드 스크린이 바쟁이 말하는 영화사 내 기술적 혁신이다.
먼저 ‘사운드’의 도입은 영화를 한층 더 사실주의적으로 편집되게 만들었다. 다양한 사운드 효과와 말로 표현되는 대사는 현실감을 높였고, 더욱 세련된 연기 스타일을 만들었다. 또 더 이상 시각적 정보로 채워진 자막들의 방해를 받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감독은 스토리를 더욱 경제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관객이 알아야 하는 스토리 전제 역시, 몇 마디 대사만으로 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되어 지루한 해설 장면들도 뺄 수 있게 되었다.
딥 포커스 촬영기술도 편집에 큰 변화를 불렀다. 특히 딥 포커스 촬영의 미학적 특성은 심도 깊은 구성을 가능하게 했는데, 바쟁은 이 딥 포커스만의 객관성과 미적 감각을 굉장히 좋아했다. 삶의 애매성을 간직한 통일된 공간을 제시해, 이미 정해진 결론으로 관객을 이끄는 대신 관객 스스로 분류하고 평가하는 과정을 거쳐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는 것들을 버릴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와이드 스크린은 도입 당시 많은 비평가와 감독으로부터 즉각적인 반발을 일으켰다. 특히 형식주의자들은 와이드 스크린이 편집할 수 있는 부분을 훨씬 더 줄어들게 만든다며 불평했다. 모든 요소가 스크린에 수평으로 길게 배열된다면, 어떤 것도 더 이상 커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쟁은 와이드 스크린의 사실성과 객관성을 좋아했고, 편집의 왜곡성을 벗어나는 첫걸음이라며 도입을 반겼다. 실제로 딥 포커스와 와이드 스크린은 시공간의 연속성 유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보다 현실적인 시공간 표현, 복잡성과 밀도 등 다양한 디테일에 대한 객관적인 표현, 일관된 연속성과 모호성의 증대, 관객의 창조적 참여 장려 등 음향 및 딥 포커스에서의 모든 장점들 역시 와이드 스크린에 적용되었다. 이러한 와이드 스크린을 가장 처음 효과적으로 사용한 영화 장르는 화려한 사극과 서부극이었다.
시퀀스 쇼트는 관객의 무의식적 내면에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관객은 장면 중간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길 기대하는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 무엇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지는 알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짐 자무쉬(Jim Jarmusch) 감독은 그의 독특한 코미디 영화 ‘천국보다 낯선(Stranger Than Paradise)’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시퀀스 쇼트를 사용했다. 고정된 카메라가 미리 결정된 자리에서 기다리면, 등장인물들이 신에 들어와 우스꽝스럽고 천박한 인생을 연기하는데, 이내 무기력한 표정 및 침묵과 함께 종잡을 수 없는 여러 증상들을 지루할 만큼 늘어놓는다. 그들은 결국 그 자리를 떠나거나 그대로 앉아 있는데, 카메라는 그들과 함께 앉아있다 페이드 아웃하는 굉장히 특이한 구성을 보인다.
관객은 영화를 관람할 때 영화의 편집 스타일에 관해, 얼마나 많은 커팅이 있는지, 각 장면의 커팅포인트는 무엇인지, 쇼트의 길이가 긴지, 매우 단편적으로 분절되어 있는지, 커팅이 조작적인지, 관객 스스로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는지, 커팅에 영화감독의 개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지, 쇼트의 표현이 비교적 기능적이고 객관적인지, 어떤 종류의 음악을 설정하고 있는지, 영화예술가가 커팅을 비교적 하위기능으로 격하시켰는지, 아니면 영화의 주요한 언어 시스템으로 편집이 이루어졌는지 등과 같은 부분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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